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둘리틀 특공대 (문단 편집) == 결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eiTT3r.jpg|width=100%]]}}}|| || 둘리툴 특공대의 공습으로 파괴된 [[공장]] 잔해 || >이 공습은 겉으로는 일본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본토가 적의 공격에서 안전하다고 수 세기 동안 믿어온 나라로서는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 >---- >― 일본 제국 패망사 p.497 물론 대규모 공습이 아니라 불과 16대의 쌍발 폭격기를 투입했을 뿐이라 둘리틀 특공대의 성과는 사망자 50명과 [[집|가옥]] 262채 파괴 , 제철[[공장]] 1, [[석유]]저장소 1, [[발전소]] 몇 동, 개장중이던 해군 [[경항모]] [[류호(항공모함)|류호]] 우현 직격 등으로 크진 않았다. 하지만 적진 한가운데에 달랑 쌍발 폭격기 16대에 탑재된 500파운드 폭탄 64발로, 간이조준기만을 이용한 고공수평폭격으로 이룬 전과임을 생각하면 매우 준수한 결과이며, 류호의 취역 지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이 항모와 항공대 전력을 제때 보충하지 못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일본놈들 땅에 폭탄을 떨궈서 한 방 먹여준다'는 본래 목적은 달성된 상태였으며, 그 결과 일본군 수뇌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일본군은 4년 전에 '''중국군'''에게 방공망이 뚫린 적이 있는 데다가(이들은 일본 본토에까지 들어간 후 삐라를 살포한 뒤 귀환했다.) 그때 방공망이 뚫려놓고도 대비도 안 했기에 이 정도로 뚫리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언론에는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빗대서 "Do little"이라 깎아내리면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응하고 있었지만, 한창 승승장구하면서 태평양 반쪽을 집어삼키고 인도양, 호주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백주대낮에 본토의 수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고 그게 황궁 근처라 [[천황]]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장성]]이라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있게 남방작전을 밀어붙이려 했던 일본 육군이나,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으니 미군은 앞으로 2년 동안 못 나올 거라고 천황에게 호언장담했다가 4개월 만에 본토 폭격을 맞은 일본 해군의 체면이 모두 크게 손상되었고, 여유 있게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요새화를 준비하던 계획이 다 틀어지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미 항모들을 격멸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부진했던 [[미드웨이 해전]]의 작전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상세는 [[미드웨이 해전]] 항목을 참고. 그리고 일본 육군은 이를 계기로 방공도시계획을 진행시키고 대폭격기 요격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원래 점감요격이나 결전 때 미 해군을 상대할 귀중한 항공전력이 둘로 분산되어 버려 미드웨이에서 절반이 깨지고, 웨이크, 펠렐루, 오키나와에서도 차례차례 깨지며 일본군 항공전력의 숙련도는 급격히 저하되었다. 당연히 이 불가능할 것 같은 작전을 성공한 미국인들의 사기는 바로 치솟았고, 이를 선전전에 적극 이용하며 미국 정부도 정치적 부담을 덜었다. 공습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글쎄요... 군사기밀이니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고요, 뭐 [[샹그릴라]]에서 날아올랐다고 해두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샹그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다는 티베트 불교 전설 속의 이상향이다. 즉 호넷 등의 함선이 참가했다는 기밀을 지키기 위해 대충 가상의 이름으로 둘러댄 것. 그런데 기자들은 이게 정말 함선 이름인줄 알고 <비행기가 '''USS 샹그릴라 함'''에서 날아 올랐다>는 기사를 냈다. 그리고 나중에 미 해군은 정말로 [[에식스급 항공모함|USS 샹그릴라 함]]을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취역시킨다.]] 이 작전에 참가한 B-25 16대는 당연하게도 모두 손실되었지만, 특공대원 80명 중 69명이 생환했다. 둘리틀 중령은 중령 계급조차 불과 3개월 전인 42년 1월에 달았음에도 이 작전이 성공한 다음날 곧바로 [[대령]] 계급을 건너뛰고 [[준장]]으로 진급되었고 [[명예 훈장]]까지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소령에서 소장까지 1942년 단 한 해만에 도달하는, 다시 없을 진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1896년생인 둘리틀 중령은 1993년에 사망할 때까지 엄청나게 장수했다. 둘리틀의 [[대장(계급)|최종계급은 끝까지 다 올라갔다.]] 물론 제대는 [[중장]]으로 했고[* 미군 역사상 현역 복귀한 예비역중 최고 계급 사례로 남아있다. 한편, 현재 영관급 장교로 복무중인 윌리엄 스웬슨(1978년~)이 이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상태이다. 윌리엄 스웬슨은 대위로 제대한 후 3년 동안 예비역으로 있다가 다시 현역 복귀했다.] [[대장(계급)|대장]]은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둘리틀을 불러다가 예비역 진급심사를 시켜서 진급한 것이다. 휘하 [[장교]]들도 꽤 순조롭게 진급했는데, 데이비드 M.존스 [[대위]]는 [[소장(계급)|소장]]까지, 같은 폭격기에 같이 탑승한 직속부하이자 이 작전에 투입된 군인 중 [[최후의 생존자]]인 리차드 E. 콜 [[중위]]는 [[중령]]까지, 테드 W. 라우슨 [[중위]]는 [[소령]]까지, 윌리엄 M 바우어 [[중위]]는 [[대령]]까지 각각 올라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xVHF9lO.jpg|width=100%]]}}}|| || 중국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 중인 14번기 승무원들 || 공습에 참가한 80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과 같다. * 총 16대 중 10대는 도쿄, 2대는 요코하마, 1대는 요코스카, 2대는 나고야, 1대는 고베를 타격했다. 이 중 윌리엄 팔로우 중위가 이끄는 나고야 타격기의 승무원이 전원 상하이에서 일본군에게 생포되었으며 딘 홀마크 대위가 이끄는 도쿄 타격기의 승무원도 윈저우에서 일본군에게 생포되었다. 이 기체 승무원 10명 중 2명이 익사했다. * 1명[* 3호기 항공 기관사 릴런드 팩터 상병]은 불시착하던 비행기에서 탈출하다 사망. * 2명[* 6호기 폭격수 윌리엄 J. 디터 중사, 6호기 항공 기관사 도널드 E. 피츠모리스 중사]은 비행기가 바다에 떨어지면서 익사. * 에드워크 요크 대위가 이끄는 5명은 그들이 탄 도쿄 타격 8호기가 소련 영토에 착륙. 기체는 압수당하고, 5명은 억류자 수용소행. 13개월 후에 [[이란]]으로 탈주함.(사실상 석방) 당시엔 미국과 소련이 동맹국이긴 했으나 소련은 일본과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억류자로 분류된다. 소련과 일본이 중립국인 상황인데, 자기네 나라를 폭격으로 박살낸 군인들을 아무런 제재 없이 본국으로 돌려보내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쉽게 말하면 직접 풀어주고 집에 보낸 후에 서류엔 탈주로 [[가라]]쳐서 처리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이란의 억류자 수용소로 이송한 다음에 이란에 주둔하는 영국 육군 기지 근처에서 풀어준 것. 풀려난 미군들은 영국군 점령지까지 걸어간 후 절차를 거쳐 미국으로 귀국했다. 이렇게 해놓고 서류상으로는 '탈주'한 것으로 처리했다. 소련에서 잡혔는데 왜 이란인가 하면 이때가 [[렌드리스]] 물자의 이동 문제로 [[페르시아 침공|이란을 영국과 소련이 침공해]] 분할 점령하던 시기였다. 즉 영국령으로 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가까운 이란으로 이송한 것이다. 둘리틀 특공대 외에도 태평양 전선에서 기체 이상이나 항로를 잃거나 피격 등으로 인해 소련 극동 지역에 불시착한 미군 항공기 승무원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소련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편안하게 '탈주'했다. 단, 승무원들이 '탈주'한 것과는 별개로 항공기 자체는 소련이 압수해서 연구용으로 잘 써먹었다. 물론 항공기까지 되돌려주면 그건 '탈주'가 아닌 '석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탈주'인 척 하기 위해서는 항공기는 필연적으로 압수해야만 했다.[* 물론 최초 계획은 상술했듯이 소련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항공기도 렌드리스 명목으로 넘겨줄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 조치에 미국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Tu-4]] 문서 참조. * 8명은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그들 중 3명은 총살.[* 나고야 폭격기 조종사 딘 E. 홀 마크 중위, 도쿄 폭격기 조종사 윌리엄 G 패로우 중위, 윌리엄 G 패로우 중위의 부하이자 해당 폭격기의 폭격수 해롤드 스피츠 병장.] 5명은 포로수용소행. 그중 1명은 병으로 사망. 나머지는 종전때까지 수감. * 64명은 중국인들로 인해 보호받고 생존. 중국인 대부분은 일반인들. * 살아남은 공습 대원 중 4명은 나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됨. * 다른 13명은 2차대전 중 전사. [[포로]]가 된 8명은 당초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자라 하여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천황과 [[도조 히데키]],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국 포로에 대한 보복행위를 우려하는 뜻을 내비치며 최종적으로는 3명만이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종신형]]을 받고 [[베이징]] 포로 수용소에 수감, 그 중 1명이 사망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송환된 건 4명이었다. 또한 처형당한 3명의 시신은 화장 후 [[적십자]]를 거쳐 미국에 인도됐다. 한편 폭격 후 엔진 이상으로 소련으로 날아간 1기는 승무원들은 나중에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기체는 소련이 압류하여 항공기 개발에 이용했다. 나머지 모든 둘리틀 특공대 기체는 중국에 추락하였고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리 무모한 작전이라도 적지 한복판에서 비행기를 버리고 낙하산 탈출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0%에 육박하기 때문에 중국 측의 반대를 어르고 달래서 폭격기들이 중국에 착륙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후에 작전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우려대로 일본군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열심히 했다. 보복으로 중국의 비행장을 공격하고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2020년에 개봉한 영화 미드웨이 엔딩에서 언급되는 20만 중국인 학살의 배경이 바로 이것인데, 역사를 잘 모르는 관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중국의 자본을 받아 난징대학살의 원인으로 왜곡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기 착륙을 중국 측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폭격계획이 무산되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중국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에게서 나온다.[* 물론 중국이 반대했다면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련을 설득했을 것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지만 사실 소련은 일본의 내부 사정을 꽤 잘 알고 있었으며 폭격기 조종사들을 받아들인 뒤 잡아떼도 일본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외교관계자는 물론 군부마저도 소련과의 전쟁은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 또 다른 상징적인 조치로, 프랭크 녹스 당시 해군장관의 요청으로 폭탄 중 초탄에는 [[1908년]] [[대백색함대]]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받은 [[훈장(상훈)|훈장]]을 매달아 [[반품|같이 떨어트렸다.]] 이 훈장을 매다는 작업은 둘리틀 본인이 직접 행했다.[[https://www.instagram.com/p/CNz80n-rz8I/?igshid=15slbbzeef3|해당 영상]] [[영화]] [[진주만(영화)|진주만]]에서도 폭격 직전 폭탄창의 문이 열리면서 신관 앞부분에 묶어놓은 훈장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으로 이 일화를 재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